" 간 경화 말기지만, 37세의 젊은 나이이고 혼수도 온 적이 없고 식도정맥류도 없어 상태가 좋으니, 더 나빠지기 전에 간이식 수술을 알아보시면 어떨까요?"
  내과 주치의의 권유를 받고 우리 가족은 간이식 수술 수준이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다고 알려진 국내 종합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 병원 측은 수술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환자가 젊었고 상태가 양호하니 수술을 빨리 하자고 서둘렀다. 운 좋게도 간을 기증할 사람이 때 마춰 나타나서 수술 날짜가 정해졌다. 병원 측에서 제시한 여러 장의 서약서를 앞에 놓고도 우리 가족은 병원을 믿는 마음으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서명했다.

  2월 21일, 아들은 희망에 찬 눈망울로 우리에게 미소를 던지고 수술 장으로 실려 들어갔다. 아들은 지난 1년 동안 통원 치료를 하는 중에도 회사에 나가 틈틈이 일을 하곤 했었기에 나는 수술이 잘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두 손 모아 기원하며 수술 장 밖에서 숨죽여 기다렸다.
  20여 시간이나 걸린 수술이 끝났다. 파김치가 된 듯 지쳐버린 집도의가 수술장을 나와 우리 앞에 섰다. 그는 환자의 담도가 좁아 2시간 반이나 시간이 더 걸렸다고 말했다. 후에, 생체이식수술이므로 증여자의 간에서 곁간(좌엽) 475g을 떼어 붙였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때는 아들의 체중이 87kg이나 나가는데 600g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아들은 중환자 실에 옮겨진 지 1시간만에 깨어났다. 아들은 우리들에게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그려 보여 주었다. 가족 친지 모두가 축하의 말을 나누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2월 26일, 아들은 중환자실에서 무균실로 옮겨졌다. 운동을 해야 된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고 무균실 통로에서 강제로 걷게 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수술 후 겪어야할 통과 의례이려니 하며 어서 그 단계가 지나가 회복되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40도의 고열이 나면서 급성거부반응이 왔다. 거부반응억제제를 투여하여 열은 내렸으나, 투여량 조절이 잘못되었는지 신장이 요독증으로 기능을 잃어 인공 신장기를 24시간 돌리게 되었다.
 
  3.1절 공휴일에 아들은 장출혈이 시작되었다. 아들이 어려운 고비를 맞게 되었으나, 수간호사를 위시해서 담당 간호사가 모두 휴무로 쉬게 되었고, 처음 보는 간호사가 하루에 세 차례 교대되었다. 의사들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형식적으로 하루에 두 번 얼굴만 내밀고 갈 뿐이었다. 그렇게 금쪽같은 하루를 흘려보냈다. 연이어 3일과 4일의 주말이 겹쳐 우리를 더욱 애타게 했다.
  장출혈이 시작되면서 아들이 허리가 아프다고 안절부절못하는 데도 수술하고 나면 다 그런 거라며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무시해버렸고, 나와 며늘아이까지도 의사가 말 한대로 무조건 참으라고만 했다. C.T촬영을 하러 갔을 때, 온갖 의료 장비를 몸에 단 상태에서 통증까지 겹쳐 비좁은 검사실 침대에 눕지 못하고 결국 울음보를 터뜨렸다는 말을 듣고도 아마 마음이 약해져서 그랬나보다고 생각하며 대단찮은 일로 넘겨버렸으니 얼마나 잔인하고 무심한 처사였던가. 얼마나 아팠으면 장년을 바라보는 내 아들이 흐느껴 울었을까? 참회와 회한으로 어미의 가슴은 찢어질 뿐이다.
  장출혈이 계속되어 하루에 혈액 10팩씩을 수혈했다. 아들은 통증을 견디다 못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의식을 잃게 되자, 중환자실로 다시 옮겨졌다. 출혈의 원인을 찾기 위해 병원에 있는 모든 첨단의료장비를 동원하여 검사했으나 어디서 무슨 원인으로 출혈이 되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잃었던 의식은 이틀만에 돌아왔지만, 하루 두 차례씩 고열에 시달리면서 하혈이 계속되었다. 날이 갈수록 의식이 흐려져 갔고 다시 의식을 잃곤 했다. 우리는 여러 장의 서약서에 정신없이 서명을 하며 많은 검사를 줄기차게 받았지만, 하혈의 원인을 알아낼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고 초조와 불안이 밀어닥쳤다. 그래서 의사마다 붙잡고 제발 내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다.
  아들은 인공호흡기로 입을 틀어 막힌 상태로 침대 난간에 양팔이 결박되어 있었다. 의식이 돌아올 때면 제 처를 보고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을 움직여 희미한 신호를 보내지만, 감염을 우려하여 밀폐시킨 병실이라 접근할 수가 없었다. 구석진 방에 갇혀 있는 아들을 면회할 시간이 하루 두 차례 가족에게 주어졌으나 두 발말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고, 허락된 30분은 금방 지나가 아쉬움만 남기고 그곳에서 쫓겨 나오곤 했다. 아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침대에 실려 검사실로 갈 때 뿐이었다. 그때마다 침대를 따라 뛰면서 아들을 향해, 잘 참아라, 이겨야 한다, 넌 이길 수 있어, 하고 목멘 소리로 외쳐댔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아들은 의식을 거의 놓친 상태에서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하루 두 차례씩 고열에 시달렸고, 출혈의 양은 차차 줄어들고 있지만 소장과 대장, 그 어느 쪽에서 왜 생겨난 출혈인가를 알아내지 못해 답답하기만 했다. 주치의는 언제 다시 출혈양이 많아질지 모른다고 초조해했다. 암흑 속을 헤매는 듯한 하루 하루가 지나갈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하필 내 아들한테...... . 전신을 짓누르는 초조와 불안이 내 가슴속에서 병원측을 향한 불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출혈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의사들의 성의나 정성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식수술을 잘한다는 소문 탓으로 전국에서 환자가 밀려들어 수술팀은 1주일에 다섯 번 이식수술을 하고 있었고, 하루에 세 번씩 일반수술까지 할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의사들은 하루 두세 시간 밖에 잠을 못 잤고, 너무 과로해서 짬시간도 쪼개서 쉬어야 하는 상황인데, 책을 뒤져보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외국의 이식전문가들을 찾아 정보를 교환하며 연구할 시간이 있겠는가. 내 눈에 비친 그들은 환자를 놓고 실험용 쥐와 같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낡은 지식만을 밑천삼아 무책임하고 무감각하게 스케줄을 따라 하루 하루를 넘어가고 있는 듯하여 나를 더욱 깊은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3월 21일, 아들의 장출혈이 시작된 뒤 21일째 되는 날, 출혈의 원인도 찾지 못한 절망적 상태의 내 아들을 두고 지도교수인 주치의는 1년 전부터 예정된 스케쥴이라며 학술대회 참석차 외유를 떠났다. 죽어 가는 내 아들은 어떡하라고, 피를 쏟아내며 내 아들이 죽어가는데 어떡하라고, 눈물범벅이 되어 발을 동동 굴러대는 나에게 의사들은, 늙은이가 극성도 심하다, 거치적거린다,며 짜증을 냈다.
  주치의는 나흘만에 돌아왔다. 그러고 이틀 후, 아들은 갑자기 숨을 몰아쉬었고, 배가 불러 올랐다. 배에 피가 괴어서 그런다고 했다. 전날 시행한 간 조직검사가 잘못되어 간에서 출혈이 된 것 같다며 28일 새벽 1시에 다시 개복수술을 했다. 수술 결과 취장의 꼬리 부분이 썪었다고 했다.
  문헌에는 나와 있지만, 이식 사례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예가 없었기 때문에 손을 쓰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너무나 기가 막혔다. 문헌에 있는 것을 왜 찾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이게 의사로서 할 말인가? 그렇다면, 왜 그렇게 온갖 헛검사는 수없이 하여 내 아들을 참혹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향해 내몰리게 했단 말인가? 취장이 썪으면 취장에서 분비되는 소화액이 강력해서 취장 주위의 장기를 녹여버리므로 대장이 뚫려 출혈이 됐다 한다. 하루에 두 번씩 그렇게 수없이 많이 혈액검사를 하고서도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의사나 간호사는 아들이 허리가 아프다고 쩔쩔매며 울 때면, 이식 수술하면 다 그런 건데 웬 엄살이 이렇게 심하냐, 고 면박을 주었다. 취장 괴사로 인한 무참한 허리 통증을 호소해도 세균 감염이라는 핑계로 가까이에서 관찰하지 않고 창 밖에서 보며 환자의 호소를 무시해버린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당시 근무했던 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 채 다른 환자보호자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음악을 감상하라고 아들의 머리맡에 카셋트를 넣어주었을 때, 얼굴을 돌리고 외면해버리던 그의 모습, 우리의 어리석음이 통한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도 참을성 많고 착한 아들은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올 때면 어미도 처도 원망하지 않고 애처럽고 기운 없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 지옥같은 취장괴사의 고통을 한달 기까이 겪어내면서 아들은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재수술 3일 후 새벽 2시, 중환자실 문밖을 지키던 가족들은 주치의의 호출을 받고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아들의 병실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병실 안에서는 여러 명의 의사가 아들을 둘러싸고 꺼져가는 심장을 되살리려고 심장에 충격을 가하고 있었다. 주치의가 임종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 속에서, 나도 죽어야 하는데... 동물의 본능으로 울부짖기라도 해야하는데...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돌았으나, 생때같은 자식의 마지막을 보는 어미는 그냥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들의 주검은 처참했다. 한달 동안 감지 못한 머리칼은 떡이 되어 수세미 같았고 손톱은 자랄대로 자라 비틀려 있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올라 그 모습에서 본래의 내 아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늘로 쑤시고 멍들어 찢겨져서 만신창의가 된 아들의 몸뚱이는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침대 위에 널부러져 있었다. 아아, 내 아들, 불쌍해서 어떡하나! 불쌍해서 어떡하나!
  살아남은 자들은 잔인했다. 중환자실에서 시간을 끌 수가 없다고 해서 나와 며늘아기는 채 식지도 않은 아들을 침대 시트에 싸안고 서둘러 영안실로 내려와 냉장고 서랍에 밀어 넣었다.

  내 아들의 37년의 삶.
  어렸을 때는 개구쟁이로 말썽을 부려 기쁨을 주었고, 장남인데도 오직 그림 그리기만을 좋아하며 공부를 하지 않아 어미의 자식에 대한 속물적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아들은 익살과 재치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웃음과 사랑을 주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면서도 그 무렵 남들이 하지 않던 미개척 분야라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선택하여 술도 담배도 휴식도 여행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그림에만 미쳐 있었다.
  고교 3학년 때, 혈액검사 결과 B형 간염 양성 판정을 받았는데, 주변의 간염 환자들이 그렇듯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가, 5년 전 갑자기 간 효소 수치가 700∼800으로 치솟으며 소변이 커피색으로 변해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2년 동안 인터페럴 치료를 하였으나 내성이 생겨 재픽스로 바꿔 2년간 복용했다.
  내과 주치의가 B형 간염 환자가 한 두명이냐며, 가장이 일하지 않고 쉬면서 식구들을 굶어죽게 할거냐며 일해도 된다고 말하자 아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기뻐하며 밤을 새워 일했다. 1999년 가을부터 재픽스도 내성이 생겼는지 간의 GOT GPT수치가 200∼300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운이 나쁘려고 그랬는지 역삼동에 있는 건강가족동호회를 알게 되어 그곳에서 건강보조식품들을 사다 먹였는데 하루에 20봉지씩 먹고 나면 아들은 배가 불러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혹시나 해서 미련하게 2주일을 먹이고 나니 배에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급히 병원에 입원해서 이뇨제를 복용하고 치료했다. 이뇨제를 끊으면 늑막에 복수가 차서 복수를 두세 차례 빼냈다. 신장은 신장증후군으로 하루에 단백질이 5g씩 배설되었고, 소변에 피가 섞였지만 신장 기능은 정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년 동안 통원치료를 하는 중에도 아들은 틈틈이 회사에 나가 일했다.

  영상매체(TV)나 신문이 뻥튀기로 부풀려 뒤떠들어대는 뜬소문에 현혹된 어미가 닥치는 대로 수술해버리는 이식공장에 아들을 등 떠밀어 집어넣어 불량품을 만들어 폐기 처분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나를 끝없이 괴롭히고 있다. 세계적인 수준이라던 환상에서 깨어 나보니, 우리나라는 아직은 이식수술의 황무지로서 개척시대의 실험단계라는 깨달음이 왔다.
  내 아들은 애처가였고, 효자였다. 어린 제 처를 외국에 보내 공부시키면서 병들어 힘들 때에도 외로움을 참으며 떨어져 있었고, 병구완을 잘해서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는 내 소망에 감사하며 어떤 어려운 일도 잘 참아주었다. 아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을 알기나 하고 떠났을까, 가족과 친구들이 통곡하며 울부짓는 소리를 듣기나 했을까? 어미는 낮 밤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나도 아들이 떠난 순간에 함께 죽었어야 했다는 생각뿐이다. 이제 내 생애는 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라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얄밉기만 하다.
  주치의는 수술을 안 할 경우 1년은 더 살 수 있다고 말했었다. 복수가 차면 나머지 수명이 평균 5년이라는 통계인데 의사는 대충 줄여서 1년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그들이 그 1년의 수명이라도 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재수술을 3일만 일찍 서둘렀어도 희망이 있었다던 주치의의 말,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1년을 더 살수 있다는데 무모하게도 러시안 룰렛 게임에 내아들의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 되었구나. 이식 수술의 시기는 의사도 보호자도 어느 누구도 모른다. 수술하다 잘못되면 죽는 것이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 후회나 없게 간이 다 굳어져 죽을 순간 그 직전에 모험을 하여 살면 천운이고 죽으면 제명을 다 산 것이니까 체념할 수도 있다. 젊은 나이에 병세가 악화되지 않았을 때 수술을 빨리 해 치워버리면 회복이 빠르다는 의사들의 꾀임에 속지 말기를 ....단지 의사들의 수술경험을 쌓아주는 수술대 위에 소모품밖에 되지 않는다.

  아들에게 1년의 삶이 더 주어졌다면, 잘 나가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이미 계획되어 있던 작품을 시작했을 것이고, 마무리짓지 못한 회사 일을 매듭짓고 새로운 작품 구상에 들어가 남은 시간을 보람 있게 보냈을 것을...... . 그러고 결혼 후 5년 반이나 미루어왔던 둘만의 달콤한 여행도 했을 것이고, 처의 학업을 위해 미루어왔던 분신을 태어나게 하기 위한 노력도 해볼 수 있었을 것을...... . 또 가족이나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안녕'이란 말도 할 수 있었을 텐데...... . 아들아, 어미의 미련과 회한은 끝이 없구나.
  그렇다고 생명경시에 중독된 의사들한테만 원망의 칼을 들이댈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교육에 문제가 있어서, 의사를 지망하면서도 약삭빠르게 힘 안 드는 과 만을 선택하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란다. 힘들고 고달픈 외과를 지망하지 않아서 종합 병원에는 외과의사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나마 외과를 지망한 의사들은 사명감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종합병원도 이윤을 생각하는 기관이다. 그들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의사들에게 박봉을 주고 혹사시키고 있으며, 또 의사와 간호사의 숫자를 줄이기 때문에 이식환자는 수술 후 하루에 두 번 얼굴을 내미는 의사, 그것도 감염을 걱정하여 멀지 감치서 슬쩍 보고 가는 의사들의 손에 생명을 내맡기는 꼴이 되었다. 그 이식 수술팀 의사들은 외래를 보고, 수술을 하고, 수술 후 환자 관리까지 1인 3역을 하며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있는데 언제 어느 틈에 책을 보고 연구를 해서 의사로서의 학문적 연륜을 쌓아 가겠는가? 병원 건물은 웅장하지만 시설은 낙후되어 있는 종합병원의 외과의사들이야말로 사회 구조의 피해자요 희생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병원 24시'와 같은 영상매체에 비춰진 병원을 바라본 장미빛 시각.
  안이하고 감상적이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영상매체(TV) 종사자들의 수동적이고 의욕 없는 자세도 문제가 있다. 간 이식수술의 성공률은 85%, 실패율은 15%라고 발표했다면, 15%의 어두운 그늘이 85%의 거름이 되었음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수술의 실패로 폐기되어 처분된 소모품의 실태도 대중매체에 방영되는 형평성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귀순 조종사의 간이식 성공담, 어느 가수 부자의 일화, 우리 나라 저명 외과 의사의 외국에서의 간이식 성공담 따위만을 보도하는 신문은 실패사례도 보도하여 독자의 판단에 도움을 주고 또한 정부는 암환자를 위하여 국립 원자력병원이나 국립 암센터를 둘씩 세우면서 장기 이식수술을 해야하는 그 많은 환자들을 위해 국립 장기 이식병원은 왜 세우지 않고 민간 병원에 방치 해 버리는가 ? 국립 장기이식 병원을 세워서 이식 수술 후에 환자 관리는 전문적인 의사들의 독립연구 기관이 맡도록 해야한다. 그래야만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자 각자의 하나뿐인 생명을 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식공장의 기능공으로 전락하고 있는 외과의사도 세계적인 권위자로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기록이 승자 편에 편향되어 있듯이 언론도 성공한 사례만이 비중 있게 보도된다. 하나의 성공이 있기까지는 숱한 시행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성공할 수도 있는 수술이 불행하게도 수술이 실패했을 경우 그 실패의 상황과 원인을 보도하여 수술에 임하는 환자들에게 지식을 주고, 그에 대비 할 수 있도록 성공 사례 못지 않게 실패의 경우도 정보를 제공함이 언론의 소명이다.

  일본의 그리 유명하지 않은 개그맨 하기와라씨는 간암 말기 환자로 일본의 간이식 계에서 수술할 수 없다고 손을 들어 그의 동료들이 수술비 5억 5천만원을 모금하여 미국으로 가 신장까지 바꿔치고 돌아와 1년만에 고국의 무대에 섰다. 일본의 이식수술 수준은 우리 나라보다 훨씬 높은데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손을 드는 그들 의사의 양심과 의학수준에 경의를 표한다. 이에 비해볼 때, 우리 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어떻게 되든 밑져야 본전이고 사람은 죽어도 병원에는 몇 억대의 치료비가 떨어지지 않는가? 폐쇄적이고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우리 나라 의학계는 정보를 주고받지 않고 수술의 성공 횟수만을 가지고 병원끼리 경쟁할 따름이다. 수술하지 못할 것은 못하겠다는 의사로서의 양심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나도 아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수술을 받게 했으면 죽이지 않았을 것 아닌가? 아들의 창창한 앞날, 그 애가 해야할 일이 태산같은데 아들은 외따로 떨어진 차가운 흙 속에 두 손을 놓은 채 홀로 묻혀 있다니...... 죽지 못해 연명하고 있는 어미, 너를 따라가겠다고 애처롭게 울고 있는 어린 네 처, 눈감지 못하고 떠났을 너!
  어미를 용서해다오, 어미를 용서해다오.......